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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찾음

들녘바람 2025. 2. 26. 13:29

김동진 ? 전우

옛날 경기도 포천 2동 인걸로 기억합니다.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2대대 ....  당시 소대장 "주 광" 소위.

내가(웃는모습) 베트남 파병 되기 전에 찍었던 사진 입니다.

사진 속 전우의 이름은 김동진 씨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 ???

자대 배치후 오래 근무를 못해서 기억이 틀릴수도 있습니다.

같은 일병 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잘 지내고 계시 겠지요.

이젠 옛모습은 없을터이니 길에서 지나쳐도 모를겁니다.

세월이 흐르니 가끔씩 옛날 힘들던 시절들 마저도 그리워 집니다.

이곳은 경남의 조그만 읍지역 입니다.

아시는 분이나 본인 께서는 이글 보시면 연락 바랍니다.

또 당시 함께 생활했던 전우분들도 보시면 연락 주십시오.

꼭 만나본다는 것 보다 소식알면 얼마나 반갑고 좋습니까?

우연히 거소지 지날일 있으면 소주병 지참, 안부 여쭙겠습니다.

 

아득한 날 군대 병장 한달봉급 520원(?)시절, 

부대 매점에서 배고픔을 어느정도 채워줄 비용 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일등병, 일병때 베트남 전쟁터 파병되었습니다.

그날, 부산항 수송선 갑판에서, 내나라, 한없이 바라봤습니다

이땅을 다시 볼수 있을까 ? 생각하니 눈앞이  흐려집니다. 

사내가 이래선 안된다 다짐 하지만 눈물이 흐릅니다.

뱃고동 소리까지 너무나 구슬프고.... 

파병생활은 "인생관" 의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 주었으며

힘들고 어렵던 모든것들은 정신 성장의 영양소 였습니다.

부산항 출발하던때가 엇그제 같은데 무사히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후에도 군생활은 아직도 일년이 훨씬 넘게 남았었는데

배치 부대의 늙다리 고참 상병들이 날보고 겉보리 병장이라 합니다.

상병들에게 조신하게 대해달란 뜻이 담긴 표현 이겠습니다.

앞으로의 생활이 평탄치 않을거란 느낌 ! 

진급이 무척 힘들던 시절이라 상등병 제대가 많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일찍 진급된 병장들이 미워서 겉보리 병장이라 했습니다.

( 겉보리는 키가크고 가스라기가 많은 조생종 보리 )

꽁보리밥 이란 말이 있던 시절, 겉보리는 더 천덕꾸러기 였습니다.

 

게다가 내가 PX(군부대 매점) 에서 근무하니, 이놈이 ? 했을겁니다.

배치부대 면접때 잘하는게 뭐냐 물어서 주산 조금 한다고 했는데

  [* 주산(주판계산) - 전자계산기가 없었던 시절의 숫자계산기 *]

병적기록부 검토 하더니, 경리업무 하려면 테스트 필수 랍니다.

선발 하기전 각부대 엘리트 경리병 소집, 그들과 함께 테스트 실시.

무작위 자료 테스트에서 무사히 통과 ! 인사 담당관이 즉석 발령. 

매우 복잡한 업무로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매점(PX) 발령 되었음.

이곳이 제대하는 날까지 나의 군생활 마지막 근무처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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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막걸리 1.8 [L] 값이 30원이하? 였습니다.

내소속 본부중대 대원들에겐 넘치게 퍼주니 좋아들 했죠.

담배 좋아하는 전우들... px 담배 나오면 숨겨뒀다 자기에게

달라고 ...휴가갈때 부모님 선물용, 시중 담배값은 20원 이상,

화랑담배는 10원 이었으니 아주 인기였습니다.

담배 때문에 내가 목에 힘좀 줬던 시절입니다.

(  사병은 무료로 2일에 한갑씩 공급했는데  비흡연자 들은 ,

 모아서 고참들 휴가갈때 선물로 또는 골초들께 서비스 ....)

술(탁주)은 개인별 일일 정량(360ml)만 공급토록 규정. 고참들이 

정량 오버해 달라고 수통 드리밀면서 내게 을러대곤 했었죠. 난감...

왈, 군대 정량이란거는 입술에 바르는 량밖에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장교들 에게만 정량 따지고 우리(병사)들에겐  그딴거 하지 말라고!.

 허~ 참 !,  나역시 공감은 합니다. 맥주는 높은분들 차지...

미운 분들이 맥주찾으면 숨겨두고 없다고 오리발 했었습니다.

군납용 물품들은 면세품 이라서 시중보다 많이 염가 입니다.

 

군시절 !  힘듭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도 그립습니다.

그 공간 속에는 봄을닮은 다시올수 없는 젊음이 있었기에 !,.

병영, 인생의 가장 보람된 인격 수련 장소 였습니다.

항상 전우들의 미소가 있어 행복했던 생활 이었습니다.

나의 군생활은 잦은 이동발령 때문에 근무지가 다양 했는데

베트남 에서도 전.후방지역 세곳 부대에서 근무를 했었고 ....

왜 내게만 이렇게 역마살 이 끼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전우들은 자대배치 받으면 제대 때까지 계속근무 였는데.

나는 교육대들 제외 해도, 다섯군데 부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아마 나처럼 이렇게 전출 많이 다닌 일반 사병은 없을 겁니다.

내 여덟자(팔자) 가 동화속의 알라딘 처럼 굴곡이 많아서~~!

동일부대 장기 근무를 못해 전우들 기억도 뚜렷치 않습니다.

가장 오래 근무했던 곳이 귀국후 px 업무 시절인데  24시간을

거의 매점에서 생활 했기 때문에 기억된 전우들이 거의 없습니다.

성함을 꼭 알려주시고 그때의 사진 있으시면 함께 보내 주십시오.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나게 될겁니다. 오래됐어도 전우는 기억납니다.

 

군생활, 모두에게 힘들었던 일들 절대 잊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밤 단체기합 , 고향이 그리워도.... 노래.... 눈물의 합창 !

기합. 빳다(몽둥이), 강추위속 펜티집합에 말뚝 보초 기억까지.

배고프고 , 춥고, 항상 졸립던 졸병 시절이 평생 잊혀 질까요?

잦은 완전군장 야간 행군때는 걸으면서 잠을 잤었으니까요.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웃고 살자고 하던 형제들 이었습니다.

( 다행히 매점(px) 근무때는 내게 그런 힘든일들은 없었습니다.)

그시절 군 생활이 훗날 국가발전의 강인한 추진력이 됐을겁니다.

확신 합니다. 인내 와 끈기, 협동심을 3년간 배우고 나왔으니까.

 

군 미필자는 이 글들이 이솝이야기 정도로 느끼 겠지만....

 

베트남 파병전의 초임지 전우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간은 짧았지만 정겹고 가족같은 전우들 이었습니다.

신참일때 힘들지 않도록 잘 보살펴 주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고참은 비상때 군장 꾸리는걸 도와 주기도 했었고.

말들은 없지만 나에게 붙은 데모병 꼬리표가 안쓰럽고

머잖아 베트남 파병되어 전사할 가능성도 있으니 짠해서....

많이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데모병 - 

- *( 재학중 데모하다 걸려 강제입대된 사상불순 사병) *

 

그당시 전우들 같은 단란함은 다른곳엔 없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따스한 정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분들. 김구록, 김국광.이수일.?정섭?(진도?). 지명락 ...

  군기맨 멋쟁이  심**  하사(경기도 말투) 등등.

폰을 팽개쳐 놓고 생활하는 편이니 메일로 연락처 합니다.

전우분들 항상 건강하십시오.

* e mail /   quftpt@daum.net